낙서하는 호호아줌마/리뷰

청승 맞아 보여도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날카로운 호저 2015. 5. 22. 18:34

 

1. 미미한 열아홉 청년과 서른일곱 유부녀의 만남

일본에서 제 41회 문예상을 수상한,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는 28살의 여성 작가가 '야마자키 나오코라'라는 필명으로 그려낸 열아홉 남자의 이야기다.

 

 

'섹스'는 섹스만이 아니다섹스는 전제되어 있을 뿐.

 

이런 게 사랑인가 하는 것도 이미 알 수 없었다그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대한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유리와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거야.'라고 생각하는 한편에선, '내 운명의 여자는 따로 있어그때까지의 시간 때우기야'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타오르고 있는 불은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다그러니까 태우지 말고 그저 조용히 잘 지낼 수는 없을까하고 바라본다그러나 심장이 타오르고 있지 않다면 살아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정이라고도 사랑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리에 대한 애틋함이 나를 휘몰아쳤다이유도 모른 채 열정적이었다.

 

정이라고도 사랑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애틋함'을 '섹스'로 표현한다그러한 애틋함은 섹스를 전제로 생겨난 것일까그는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는 것에 대해 '곁에 있었으니까 마음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몸을 붙이고 있었으니까'라고 설명한다.

 

둘의 만남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유리와 남편과의 관계에도유리의 일상에도그리고 그의 일상에도둘의 미래에 대한 소망도 기대도 없는 만남그 만남을 '사랑에 빠졌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도 그 미미한 관계를 '늘 그저 서로 가볍게 즐길 뿐이다'라고 정의하지만유리의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신용하고 싶어한다그렇게 그는 그녀로부터 비롯되는 마음의 상처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하지만 상처는 사랑의 전유물인 걸둘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었으나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변모하고 사그러지는 과정을 그렸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사랑이 찾아왔다는 걸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까다들 '이게 사랑인가?' '사랑인 것 같아'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순간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리기 전에 '사랑'은 찾아왔다고 말할 수 없는 아리송한 감정나오코라는 그를 '섹스'로 표현했다.

 

그가 그녀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땐혹 자신의 모습이 '자기 연민을 즐기고 있는 것같다고 해도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하고 있는 일이니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사랑은 통속적이기도 한 감정이다사랑의 배신을 도덕적인 범죄로 미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물론 불륜 제외), 헤어짐과 만남의 번복눈물과 설레임웃음의 변덕은 제 3자를 당황스럽게 한다가끔 못난 애인과 헤어지고 온 친구의 눈물이 청승맞게 느껴진다고 해도그러한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말고쉽게 말하지 말고진지하게 바라봐주라는 메시지덧붙인 역자의 설명 또한 구구절절하다.

 

어떤 사랑-섹스이든무거워 보이든가벼워 보이든순수해 보이든너저분해 보이든당사자들은 나름대로의 사연과 아픔과 진지함을 가지고 하는 일일 것이다그러므로 우리타의 사랑-섹스를 비웃지 말기를.

  

 

유리를 향한 감정유리에 대한 걱정유리의 낮은 온도에 대한 아픔그리고 이별이라고 할 수 없이 갑자기 끊어져버린 만남포괄적인 섹스와 사랑에 대한 탁월한 묘사들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2.열아홉 청년의 시각으로 그려진 변화로운 계절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문턱그리고 겨울변화로운 계절을 열아홉 청년의 시각으로 보는 묘사가 인상적이다자신의 일기를 묶어 놓듯 일상적이고 담담한 문체이야기는 청년의 마음을 따라 이리저리로 옮겨간다특히 이야기가 시작되는 도입부의 계절 묘사가 멋지다문구가 겨울 같았다.

 

 

입술도 머플러도 손끝도 메말라 있었지만공기의 메마름을 감지해낼 수 있는 나는 사실 습한 존재다뱃속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다마음도 역시 눅눅하고 따뜻하다. '인간이란 멋진 존재야'라는 바보스런 생각을 하면서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3.야마자키 나오코라의 이 책은 기억에 남는 한 줄들이 너무 많다.

 

#. 그 정도 경험으로 사랑이란 걸 알게 된 건 아니지만그래도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얼마나 상처 입게 되는 지 깨닫게 됐다. (중략늘 할 수 있는 배려를 해주면서도 강한갑자기 혼자가 되더라도 태연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지니고 사귀고 싶다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유리에게 너무 빠져 있어서 행여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소심증 때문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지고 싶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소리다상대를 소중히 여기고 착실한 인간관계를 쌓아가면서애무는 천천히다정하게정성껏동시에 에로틱하게상대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면서 해야하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랑을 해보면 이상형이라는 게 따로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모습에 마음이 빨려들고 만다그런 것이다내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거기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내 마음이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 "내가 힘이 되어 줄 순 없나요집에 가서 오야코동 만들어 줄게요얘기하기 괴로우면 안해도 돼요그저 곁에 앉아서 차나 마셔요."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한동안 혼자 있고 싶어." 몇 마디 더 묻고 대답하는 사이그녀가 정말로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전화는 온도다말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다단지 온도만 전해진다나는 유리의 낮은 온도를 느꼈다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싹오싹 전해져 왔다그것이 유리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 만약에 신이 자신의 애완동물들을 굽어 살필 때가 있어서누군가 흔해빠진 행동으로 자기연민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본다 해도나름대로는 진지하게 하고 있는 일일 테니까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 언제쯤부터 사랑이 끝나있었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지만 자주 유리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이런 진부한 대사를 뱉고 싶진 않지만,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목마른 사람처럼 연인을 갈구하고 있다부둥켜안을 사람이 없다는 건 사막 한가운데를 거니는 것과 같은 감각이다가슴에 뻥 뚫린 구멍이건 여자가 생기면 어쩌면 메워질지도 모른다새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괜찮아지겠지하는 생각도 하지만 어린 나에겐 언젠가 생길 거라는 추측은 할 수 있어도지금 당장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

 

유리로부터 받은 머플러를 두르고 외출할 때면, '다음에는 직접 떠 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하는 미련 섞인 투정을 속으로 잔뜩 늘어놓았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그게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외로움이라는 건 유리도다른 그 어떤 여자도메워줄 수 있는 게 아니다무리해서 해소하려 하지말고 그냥 꼭 끌어안고 가자이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사랑스럽게 여기면서 함께 하자평생 따라온다고 해도 좋다.

 

 

2012.08.22